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 약속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가까운 친구와 점심을 같이 하기로 하는 가벼운 약속이 있는가 하면 일생동안 고락을 함께 하기로 하는 무거운 약속도 있다. 약속은 반드시 개인 사이에만 이루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가족과 가족, 직장과 직장, 국가와 국가, 그리고 개인과 이들 집단 사이에도 이루어진다. 심지어 약속은 자기 자신과도 성립된다. 어떤 경우 무슨 일을 하기로 자신과의 약속이 이루어졌을 경우 우리는 흔히 그것을 ‘결심’이라고 부른다.
약속의 핵심은 당사자가 그 내용을 지킨다는 데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처음부터 지킬 의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약속을 했다면,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보편화된다면 약속이란 사회적 관행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만약 여의치 않은 경우가 있더라도 지켜보려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약속이란 무엇인가. 가령 내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10만원을 빌린 다음 한 달 후에 갚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하자. 나는 그 사람과 지금 약속을 했지만 그것이 이행되는 것은 한 달 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시간까지 같은 상태로 존재해야 하고 상황도 크게 변화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나의 마음이 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금 나는 지금의 그와 약속을 한 것이지만 한 달 후의 그와도 약속을 한 것이며 무엇보다 그것을 이행할 나와도 약속을 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들을 충분히 인식한다면 약속은 신중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며 또 성실히 지켜져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모든 약속은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약속은 신중히 이루어지고 또 성실하게 지켜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로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는 사회를 ‘성숙한 사회’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글쓴이 : 엄정식
서강대 명예교수
전 서강대 대학원장
전 한국철학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