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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이 시대의 위인”에 대한 감사 (오윤덕)
 관리자  | 2008·09·26 11:39 |
  기부는 가진 것이 많아야 할 수 있는 덕행이 아니다. 많이 갖지 못한 이웃 간에서 기부를 통해 상부상조해온 아름다운 미담은 얼마든지 있어왔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에게 기부문화가 미흡하다고 개탄하는 소리가 높은 것은 가진 자들에 의한 기부가 별로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질타로 이해된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우리에게도 차츰 기부가 늘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 그리고 조지 소로스를 바라보면 우리의 기부문화는 우선 그 규모면에서 초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최근 한의사로 성공한 류근철 씨가 승자의 삶에 그치지 않고 땀 흘려 모은 578억 원의 거금을 “내 돈이 아니라 내가 관리하는 돈”이라면서 KAIST에 과학인재양성을 위하여 기부를 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자린고비의 삶을 관통하며 나눔을 실천해낸 당신의 일화는 참으로 신선한 감동으로 와 닿는다. 류근철 씨의 고귀한 뜻이 잘 받들어져서 이 국가사회는 물론 온 인류가 그 귀한 열매를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제2, 3의 류근철 씨 같은 독지가가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통상 부모는 자식에게 물려줄 재물이 없어 못 물려주지 재물이 있으면 몽땅 제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재물이 있으면 그것을 당연히 그리고 고스란히 유산으로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기부는 제 처자식에게 갈 재물을 제 처자식이 아닌 남에게 무상으로 내어주는 그야말로 선행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행이든 어떻든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격으로 선행은 둘째 문제이고, 당장 기부란 것이 재물의 처분이 아니던가. 재물이 무엇이던가. 잘못하면 그것으로 하여 부자간에도 살고 죽고 하는 마성(魔性)이 낀 그 재앙의 대명사가 아니던가. 그러기에 기부에 세간의 칭찬과 명리나 바라는 수준으로 다가갔다가 처자식이 기부의 참 뜻을 이해해주지 않기라도 하게 되면, 기부는 자칫 부부간, 부자간에 평지풍파가 되어 의절을 낳는 불행의 씨앗이 되기 십상인 것이다. 그러기에 류근철  씨의 기부에 상찬을 표할라치면, 저절로 부인과 자제들이 무상으로 얻을 수 있었던 상속의 수혜를 감히 포기한 용단에 대하여도 경의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물을 이기의 목적으로만 파악한 채 일생을 살아가고 있고, 특히 식자들 대부분도 “공부해서 남주냐”는 생각으로 공부를 하고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이들의 입장에서 기부를 바라보면, 그것은 도대체가 손해나는 그래서 어리석은 행위인 것이고, 삶에 대한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역발상으로만 보여 지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는 류근철 씨의 경우와 같이 용기를 내서 이루어 내는 기부의 소식을 종종 접하게 되고, 그 기부소식에 반가운 칭송을 보내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그때에도 모든 이가 기부에 대하여 쉽게 칭찬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기부자는 칭찬보다도 여러 가지 질시와 적의에 찬 구설을 당할 뿐 아니라, 더러는 재물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들어앉은 생활고를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기부 특히 고액의 기부는 본시 만물의 영장인 인간 가운데 꿈을 지닌 사람들이 나눔이 갖는 참 행복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고 순수의 열정과 겸손으로 이상을 향해 펼치는 영적 결단인 동시에 삶의 보람에 이르는 구도자적 도전인 까닭에,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누구나 다할 수 있는 그런 용이한 행위가 아닌 것 같다. 오죽하면 모 일간지가 류근철 씨의 용단에 대하여 “이 시대의 위인”이란 제목을 달아서 사설을 다 썼을까. 그러나 어떻든 기부문화의 사회적 정착은 공산주의의 허구성이 입증된 오늘날, 자본주의가 참다운 성숙으로 들어설 수 있게 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최대 덕목이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인 것은 분명하다.


  차제에 좀 섣부른 장광설 하나를 곁들여보자. 기부는 많을수록 좋은 일인데, 기부가 오늘날 많이 미흡한 것은 가진 자들의 선의부족에만 그 책임이 있는 것일까. 기부를 받는 쪽의 자세는 그러면 아무래도 되는 것일까. 기부를 받는 쪽은 기부를 유도할 때는 흔히 간이라도 빼어줄듯이 굴다가도, 기부를 받고나면 여측이심(如厠二心 뒷간에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는 뜻)이 되는 경우를 흔히 본다. 기부 받는 측이 기부는 돈 있는 사람이 자기 자랑이나 하려고 내놓는 선심치레인데 고마워 할 것도 없다고 나온다든가, 왜 기부금액이 이렇게 적으냐 기부물품의 질이 왜 이 모양이냐고 불평을 한다든가, 장학금을 받게 된 것은 내가 공부를 잘하고 잘나서 당연히 보상으로 받는 것쯤으로 치부한다든가, 어려웠던 시절 어렵게 기부 받아 지은 건물을 훗날 재정형편이 좀 나아졌다고 냉큼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최신건물을 짓겠다는 발상을 낸다든가, 아니 모처럼 받은 기부금을 아예 떼먹어 버린다든가… 하는 식의 무성의 하고 몰상식한 태도가 횡행해서는 기부문화를 꽃피우는 길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기부를 하였다가 자신의 기부의 참뜻이 소홀하게 다루어지는 모습을 경험하고 두 번 다시 기부를 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을 종종 접하게 된다. 기부문화를 성숙시키려면 기부를 받는 쪽도 기부하는 쪽에 못지않는 각성과 분발이 필요할 것 같다. 과연 모 대학에 거액을 기부했던 어떤 분이 기부금이 약정했던 목적대로 쓰여지지 않자 대학에 기부행위취소소송을 제기했다는 기사를 근자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요컨대, 기부는 주는 쪽에서는 줄 수 있어 감사하고, 받는 쪽은 받을 수 있어 감사하는 그런 소중한 마음바탕을 서로가 갖추도록 노력해 나가야하고, 국가, 사회적으로도 그와 같은 신뢰의 인프라가 구축될 수 있도록 다방면의 노력을 경주해주지 않고서는 기부문화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부는 우리를 재물의 노예상태에서 인류가 지향할 나눔이 주는 행복의 이상세계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줄 거룩한 선행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부를 결행한 “이 시대의 위인” 류근철 씨와 그 가족분들께 한 번 더 감사와 상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글쓴이 : 오윤덕
‘사랑샘’ 대표, 법무법인 송백 구성원 변호사
전 한국휴머니스트회 회장
전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
전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전 사법연수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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