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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0. '손흥민'이라는 현상 - 엄정식
 관리자  | 2022·06·14 12:31 |
지난 5월 23일 새벽 한국의 수많은 축구 팬들이 손흥민(토트넘)이 아시아 최초로 잉글랜드 프로 축구 프리미어리그(EPL) 득점왕에 오르는 장면을 지켜봤다. 특히 이날 손흥민과 득점왕 경쟁을 하던 리버풀의 살라도 리그의 마지막 경기를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즐거움이 더 컸다. 보도에 의하면 이 '역사적 경기'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느라고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는 응원과 축하의 글로 뒤덮였고 일부 실시간 동영상 서비스에는 접속 오류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유튜브의 댓글에도 올라와 있듯이 그것은 "월드컵 4강 이후 최고의 경기"였을지도 모른다.

손흥민은 현지 매체들로부터도 리그 최고의 선수에 잇따라 선정되며 이른바 '월드클래스(world class)'의 대접을 받고 있다. 스카이스포츠는 그가 이번 시즌 파워 랭킹에서 8만 1,031점을 올려 1위에 올랐다고 밝혔고, BBC, 데일리메일 등과 함께 발표한 '팀 오브 더 시즌(시즌 베스트 11)'에서도 그는 측면 공격수로 이름을 올렸다. BBC는 손흥민에 대해 "동료 해리 케인이 맨체스터 시티 이적 불발로 힘들어할 때 뛰어난 경기력으로 팀을 지켰음"을 지적했고, 데일리메일은 "월드클래스 능력을 갖췄다. 그리고 지치지 않고 뛴다. 이타적이면서도 기회가 오면 득점 기계가 된다"고 평가했다. 미국 ESPN은 "살라와 공동 득점왕이지만, 손흥민은 놀랍게도 페널티킥 골이 하나도 없다"고 칭찬했다. 일본 사커 다이제스트도 "그의 마지막 골은 압권이었다"고 했다.

손흥민이 득점왕을 상징하는 '골든 부트'를 손에 넣게 한 '마지막 골'은 이른바 '손흥민 존(Zone)'에서 나온 골이었다. 이 골은 페널티박스 왼쪽 모서리 부근에서 오른발로 감아 찬 슈팅이었다. 골키퍼가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을 정도로 골문 깊숙이 꽂혔다. 이와 같이 그는 양쪽 모서리 부근에서 양발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궤적의 슈팅을 날릴 수 있는데, 그것은 어릴 때부터 반복적으로 훈련한 결과라고 한다. 그는 아버지 손웅정 씨와 함께 디딤발을 놓는 위치와 차는 발이 공에 닿는 지점에 따라 슈팅이 어떻게 휘는지 연구하면서 이 '필살기'를 완성했다고 한다. 여기에다 양발을 자유자재로 쓰며 수비수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만 가지고서 그가 유럽에 진출한 아시아의 축구 선수로, 그것도 가장 경쟁이 치열하고 수준이 높다는 프리미어리그에서 전인미답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을까. 그뿐만 아니라 구기 종목 중의 하나일 뿐인 축구를 일종의 '문화 현상'으로까지 승화시킬 수 있었던 그의 능력과 업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한 가지 해답을 우리는 최근에 출간된 손웅정 씨의 저서<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에는 손흥민을 가르치고 길러온 그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물론 처세술과 축구관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대나무는 땅 밑 뿌리 작업에만 5년의 시간을 보낸다"이다. 나무가 위로 뻗어나갈 것만 생각하면 사소한 태풍에도 쓰러지지만, 뿌리가 튼튼한 대나무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가 손흥민에게 7년간 왼발과 오른발을 사용하는 리프팅 등 주로 기본기에 열중하게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이런 훈련을 통하여 초심을 잃지 않도록 단련했으며 이러한 단련의 과정을 거쳐 축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터득하려고 했다.

손흥민은 무엇보다 기본에 충실함으로써 축구라는 것이 어떤 개인이 자신의 발재간을 자랑하는 기술의 전시장이 아니라 팀 정신이 승화된 하나의 예술임을 온몸으로 터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이타적'이었지만 기회가 오면 득점기계가 될 수 있도록 다른 선수들이 도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겸손하지만, 뿌리 깊은 자신감에서 표출되는 손흥민의 모든 언행에서 축구라는 스포츠가 격조 높은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글쓴이 / 엄정식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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