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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9. “거룩한” 확신 - 손봉호
 관리자  | 2022·06·07 13:42 |
요즘 경남 양산의 평산 마을이 매우 시끄럽다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저 주위에서 보수단체들이 번갈아 가면서 연일 시위를 벌이기 때문이다. 확성기를 크게 틀어놓고 문 전 대통령에게 욕설이 섞인 비난을 퍼부어서 문 대통령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주위에 사는 주민들이 크게 시달리고, 심지어 병원 치료를 받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한다. 급기야는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이 양산 경찰서에 가서 시위를 방치한다고 항의했고, 문 전 대통령 측은 시위 주동자 몇 명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한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이런 수준의 시위는 역사상 드물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비슷한 수모를 겪었으나 오래가지 않았고, 투옥되거나 탄핵된 전직 대통령들도 이 정도의 항의는 받지 않았다. 그런데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서 퇴임 때 가장 높은 인기를 누렸던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후 이렇게 끈질긴 항의에 시달리는 것은 좀 특이하다 하겠다.

우선 시위꾼들은 개인적 이해관계나 사감을 가지고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니다. 시위 허가를 신청한 〈백신피해자가족협의회〉는 자신들이 입었다고 생각하는 손상에 대해서 항의하려 했지만, 그 단체는 시위를 먼저 시작한 다른 보수단체들에 편승했을 뿐 주동 단체가 아니다. 처음부터 시위를 주동한 보수단체들은 이런 행사를 통하여 자신들이 어떤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사적 이해관계나 적대감이 아니라 그들 나름의 '공분'을 가지고 나선 것이다. 일제 압제에 항거하듯, 민주화를 위하여 독재에 대항하듯, 그들도 '나라'와 '국민' 전체를 위하여, 즉 공익을 위하여 일종의 "거룩한" 확신이 있어서 시간을 바치고 비용을 감수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동기가 워낙 정당하고 자신들의 항의가 공익을 위하여 꼭 필요하기 때문에 평산 마을 주민들이 당하는 불편 따위는 그렇게 큰 희생이 아니라고 무시하는 것이다.

그들의 항의는 나라의 미래나 실리를 위한 것도 아니다. 문 전 대통령이 다시 정치에 복귀할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의 복귀를 방해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앞으로는 문재인 같은 사람은 대통령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한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히 자신들이 판단하는 바 문 대통령의 "잘못"에 대해서 증오를 표현하고 그를 괴롭게 하여 그 잘못을 처벌하자는 것이다. 그 외 어떤 다른 목적이 있는지 뚜렷하지 않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소중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면서 그렇게 항의할 만큼 분노케 한 배후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보수 이념이다. 이념이 종교적 열정을 생산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런 "거룩한" 확신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개인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나라의 독립이나 민주화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처럼 이념에 근거한 이런 확신은 자신을 희생할 수 있으며, 자신들의 이념에 동의하지 않는 "잘못된" 사람들의 불편과 고통을 얼마든지 상대화할 수 있다.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삼부자, 폴포트 등을 통해 "거룩한" 확신이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했고, 얼마나 큰 비난과 저주를 전 인류로부터 받고 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승만과 멕카시의 공산주의 사냥도 그런 열정으로 이뤄졌고 적잖은 후유증을 남겼다.

인간이 생각해 낸 어떤 이념도 완벽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주장과 다른 것은 다 "거짓 의식"인 이념에 불과하고 오직 자신의 이론만이 객관적인 "과학(Wissenschaft)"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것도 후에 이념의 전형으로 낙인되었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변증법적 유물론은 모든 사람이 "능력만큼 생산하고 필요한 만큼만 소비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가져올 것이라는 "거룩한" 확신을 가졌지만, 이상사회는커녕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키는 비극만 가져왔다.

자유사회에서 이념은 없을 수 없고 가능한 한 용인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이념을 용인하지 않는 이념은 용인되지 말아야 한다. 가능한 한 다양한 이념이 공존해야 못난 이념이 가질 수 있는 "거룩한" 확신도 견제되고 약점들이 보완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자유사회의 특징이며 강점이 아닌가?

요즘 하나 크게 걱정되는 것은 한국과 미국 사회에서 이념 갈등이 매우 심각해지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미국에는 트럼프가 보수 이념을, 한국에는 문재인이 진보 이념을 좀 지나치게 정치에 반영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 면에서 지금 문재인 전 대통령이 겪는 불편에 대해서는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들이 5·18민주화운동 42주년 기념식에 대거 참석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했는데, 이는 과거 보수정권이 기피했던 것이다. 그것이 단순히 다가왔던 선거를 의식한 일회성 제스처가 아니고 심각해지는 이념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진정한 노력의 표현이었기를 바란다. 부디 새 정부는 국론을 분열시켰던 과거 정권들의 이념 편향성에서 좀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부산지역의 보수단체들도 이제는 그들의 그 "거룩한" 확신을 좀 더 합리적이고 건설적으로 표출하여 자신들의 이념이 역풍을 받게 하는 어리석음을 계속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글쓴이 /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 푸른아시아 이사장, 전 동덕여대 총장, 전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전 서울시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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