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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7.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 김기봉
 관리자  | 2022·05·24 11:23 |
인간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과거가 있지만, 인간만이 그것을 기억하는 역사를 만들어내서 삶의 교사로 사용한다. 역사는 개별적 인간이 아닌 국가와 민족과 같은 집단의 서사다. 나는 유한한 존재지만, 국가와 민족은 영속한다. 국가와 민족의 영속성과 신성함을 보장하는 정치종교의 성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역사다. 역사는 내가 한국인이란 마음을 갖도록 만드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다. 나는 나의 선택으로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한국사'라는 역사 프로그램이 입력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나는 한국인이 되었다.

현재의 결과를 만들어낸 과거는 신도 바꿀 수 없기에 역사는 운명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 공부를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스페인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가 했던 말처럼,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은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므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지만 국가와 민족의 정치종교로 작동하는 역사는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양이 되게 한다. 한국인은 일본인을 싫어하는 역사 유전자를 갖고 있다. 일본 경제가 깊은 수렁에 빠졌다는 뉴스를 접하거나, 지진과 화산 폭발로 일본이 바닷속으로 잠길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동정심보다는 그들 불행에서 기쁨을 느끼는 독일어의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가 생겨난다. 인간이 과거의 경험과 지식을 역사로 정보화하는 집단기억을 축적하고, 그것을 토대로 집단학습을 해왔던 덕분에 지구의 정복자로 등극하는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역사가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이 된다는 것을 통찰한 철학자가 프리드리히 니체다. 니체는 '역사의 인간 삶을 위한 이로움과 해로움'에서 동물은 순간의 말뚝에 묶여 있기에 우울하고 권태를 느끼지 않는 현재의 삶을 향유하는 데 비해, 역사를 통해 망각을 배우지 못하는 인간은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서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한다고 했다.

자이니치(재일교포)들의 애환과 역사를 그린 소설 〈파친코〉가 미국에서 선풍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드라마로도 제작되면서 한일 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무엇보다도 소설의 첫 문장인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가 파문을 일으키는 진원지로 회자된다. 작가 이민진은 미국 PBS(공영방송) 인터뷰에서 그것이 나의 주제문(thesis statement)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으로 이민 간 한국인 2세다. 북한 원산 출신인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혹독한 시련을 겪고 우여곡절 끝에 미국 이민을 갔지만, 딸은 한국인과 결혼하길 간절히 원했다. 그 딸이 타이완 총독을 역임한 일본 우익의 자손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부녀의 인연을 끊겠다고 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증오보다는 딸에 대한 사랑이 더 컸던 아버지는 결국 딸의 결혼을 받아들였다. 역사는 인간을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역사의 상처를 극복하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이민진 작가는 식민지, 분단, 전쟁, 학살과 같은 역사의 비극을 극복하고, 인터넷 속도, 조선, 철강, 가전제품, 반도체, 문자 해득률에서 세계 1위를 달성하는 기적을 낳은 한국인의 삶을 압축한 문장이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고 했다.

이민진 작가는 "인생이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기대하는 파친코 게임과 같다"라고 썼다. 그런 인생에서 역사는 우리를 망칠 수 있다. 하지만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역사의 재난에도 삶은 계속되고 인간은 패배하지 않는다. 주인공 선자의 삶은 불행했지만 위대하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고, 4대에 걸친 고난의 세월 속에서 솔로몬과 같은 역사의 횡포에도 상관하지 않고 자기 삶을 사는 새로운 세대가 나온다. 유발 하라리는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만 하는 이유는 과거에서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과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현재의 우리는 과거를 통해 형성됐지만, 과거의 궤적에서 벗어나가는 선택으로 역사를 바꿀 수 있다. 한일 간에 과거사 갈등의 악순환을 반복하는 역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희생자 의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일본인들을 향해 계속해서 사과와 반성을 요구하는 방식으론 역사의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소설 〈파친코〉는 역사로부터 해방은 역사를 정치종교로 이용하는 국가가 아닌 치열하게 자기 인생을 산 사람들이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글쓴이 /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철학과현실』책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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