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사회가꾸기모임
꼭대기로 올라갈까요?

 

 

 






782. 소극적 공리주의 - 손봉호
 관리자  | 2022·04·19 14:31 |
20여 년 전 어떤 첨단산업 기업인이 막대한 돈을 벌어 수백억 원을 기부하기로 하고 어디에 기부하면 좋겠는가를 물어 왔다. 장학, 연구, 예술진흥 등 사회의 다양한 발전을 통하여 많은 사람에게 이익을 끼치는 분야와 복지, 의료와 같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분야가 있는데, 나는 후자를 택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전자가 더 생산적이라고 판단했고, KAIST에 거액을 기부해서 그 학교의 학술연구와 장학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나의 뜻과는 다르지만, 존경스런 기부였고 감사한 공헌이었다. 우리나라의 거액 기부 대부분은 이와 같이 상대적으로 행복한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데 공여되고 있다. 고전적 공리주의에 의하면, 이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되므로 매우 윤리적인 행위임이 분명하다.

이런 행복중심적 공리주의에 이의를 제기한 철학자는 포퍼(Karl Popper)였다. 그는 그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고통과 행복은 대칭적(symmetrical)이지 않고, 고통에는 그 고통을 줄여달라는 직접적인 호소가 함축되어 있지만, 행복에는 그런 절박한 호소가 없다고 했다. 포퍼의 이론을 비판한 스마트(R. N. Smart)는 그의 이런 주장을 소극적 공리주의(Negative Utilitarianism)라 불렀다. 공리주의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대신 최소수의 최소고통에 기여하는 행위가 윤리적이란 주장이다.

이에 대해서 윤리학계에서 여러 가지 비판과 수정이 제시되었고, 대부분은 실천적이기보다는 주로 논리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포퍼가 우리의 윤리적 행위를 행복보다는 고통에 초점을 맞춘 것은 대체로 옳다고 봐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행복을 원하고 추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고통을 피하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바람이 훨씬 더 크고 간절하다. 물론 어떤 행위는 행복 증진과 고통 제거를 같이 수행하고, 더 큰 행복을 위해서 작은 고통을 감수하기도 하며, 행복과 고통의 정도에 따라 선택의 우선순위도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람은 즐겁게 되기 전에 우선 아프지 않기를 바라고, 행복하기 전에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맛있게 먹는 것보다 우선 주린 창자를 채우는 것이 더 중요하고 우선적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그의 행복의 증진을 돕기 전에 우선 그에게 고통을 가하지 않고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당연하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잉여선(剩餘善)'으로 '추천할' 사항이지만, 다른 사람을 아프지 않게 하는 것은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라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웃이 당하는 고통이 극심한 것이라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뒷전에 버려두고 그 고통부터 해결해 주는 것이 짐승과 다른 인간의 당연한 책임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윤리적 이론으로는 고전적 공리주의보다 소극적 공리주의가 더 타당하다 해야 할 것이다.

최대행복론인 고전적 공리주의 못지않게 최소고통론인 소극적 공리주의도 개인윤리보다는 공적 윤리이론으로 더 적합하다. 국가는 행복한 시민들을 최대한 행복하게 만들기보다는 가장 고통을 많이 겪는 약한 시민들의 고통부터 우선 줄여주는 것이 정의롭다. 정부의 각종 복지정책이 바로 그런 소극적 공리주의에 입각한 것이 아닌가?

최근 우리나라에서 이동권 개선을 요구하는 장애인 단체의 시위 때문에 비장애 시민들이 불편을 겪는 것에 대해서 시비가 일어났다. 소극적 공리주의를 한 번 생각해 볼 좋은 기회였다. 우리나라 지체장애인들이 겪는 이동불편은 대단히 심각하다. 지하철을 타거나 갈아타려면 몇 안 되는 승강기를 찾아다니느라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고, 휠체어를 타고 이용할 수 있는 저상버스는 극소수에 불과하며, 장애인 택시를 타려면 두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때가 없지 않다고 한다. 장애인들이 소수라 해서 그들의 심각한 불편까지 무시하는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에 충실한 것이 아니다. 비장애 시민들의 더 큰 교통편의보다는 비록 소수라도 장애인들의 매우 심각한 불편을 해소해 주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선진국이다.

새 정부가 공정성을 강조한다는데, 좀 더 세련된 공정성에 관심을 두기 바란다. 롤즈(John Rawls)는 "최소 수혜자의 최대 이익"을 도모하는 것도 공정하다 했는데, 새 정부는 그런 차등의 원칙에 입각해서 정의를 실현하기 바란다. 일반적으로 소극적 공리주의에 좀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사람이 살맛 나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글쓴이 /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 푸른아시아 이사장, 전 동덕여대 총장, 전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전 서울시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
     
792   792. ‘무관심’이 필요한 과민사회 - 이진우 22·06·28 23
791   791. 자서전으로 본 김지하, 〈흰 그늘의 길〉 - 윤평중 22·06·21 56
790   790. '손흥민'이라는 현상 - 엄정식 22·06·14 34
789   789. “거룩한” 확신 - 손봉호 22·06·07 38
788   788. 신경 써야 할 것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 김도식 22·05·31 29
787   787.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 김기봉 22·05·24 66
786   786.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 이택호 22·05·17 34
785   785. 페이크 워크 - 이진우 22·05·10 45
784   784.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 윤평중 22·05·03 53
783   783. 불편과 불행, 그리고 자유 - 엄정식 22·04·26 49
  782. 소극적 공리주의 - 손봉호 22·04·19 54
781   781. 실력이 보상받는 공정한 사회 - 김도식 22·04·12 47
780   780. 죽음과 <천개의 바람> - 김기봉 22·04·05 142
779   779. 신(神)은 존재하는가? - 권병규 22·03·29 363
778   778. ‘허수아비 때리기’ 논법이 통하는 현실 - 이택호 22·03·22 60
777   777. 이제는 ‘악수’를 할 시간 - 이진우 22·03·15 19
776   776. 철학자와 현실정치 - 윤평중 22·03·08 66
775   775. 거짓말에 관하여 - 엄정식 22·02·28 56
774   774. 교육수준과 환경문제 - 손봉호 22·02·22 79
773   773. 실력을 감추어야 하는 사회 - 김도식 22·02·15 44
1234567891040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