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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6. 철학자와 현실정치 - 윤평중
 관리자  | 2022·03·08 11:47 |
내가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를 보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플라톤과 디오니시우스 왕의 흔적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2020년 1월 시라쿠사 골목골목을 걸으면서 나는 줄곧 플라톤을 생각했었다. 플라톤의 정치 참여의 궤적은 플라톤이 남긴 '편지들'에서 확인된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톤의 실제 삶에 대한 기록은 이 편지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총 13편의 편지 가운데 특히 일곱째, 여덟째 편지는 진본으로 인정된다.

플라톤은 도합 3번 시라쿠사를 방문한다. 기원전 4세기 때 일이다. 당시는 지중해의 맹주 자리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동반 피폐해진 아테네와 스파르타에서 시칠리아 동남부 항구도시 시라쿠사로 이동했을 때였다. 특히 시칠리아의 참주(독재자) 디오니시우스 1세는 지중해 세계를 호령한 정복 군주였다. 떠오르던 신흥 강국 카르타고의 시칠리아 침공을 막아낸 호걸이었다(당시는 로마 전성기가 시작되기 전이다).

BC 387년경 40세의 플라톤이 머나먼 시라쿠사까지 온 건 디오니시우스 1세의 정치적 동맹세력인 히파리누스 가문 디온의 강력 추천 때문이었다. 디온은 디오니시우스 1세의 처남이자 사위로서 시라쿠사의 제2인자였으며, 플라톤의 제자이기도 했다. 디온은 스승의 이상국가를 실현할 최적의 장소로 모국 시라쿠사를 추천했던 것이다. 당시 20세의 디온은 플라톤도 인정할 정도로 명민한 청년 지도자였다.

플라톤 자신도 아테네 명문가 출신으로 젊을 때부터 간직한 이상적 정치의 꿈을 안고 시라쿠사에 왔다. 디오니시우스 1세도 지중해 세계에 명성이 자자한 플라톤에 관심이 있었으니, 전망이 밝아 보였다. 하지만 파국은 순식간에 왔다. 플라톤이 왕에게 정의로운 정치를 설파하며 직설적으로 쓴소리를 하자, 기세등등하던 왕은 대로(大怒)하게 된다. 그 결과 플라톤은 궁정 구석에서 연금 상태로 지내게 된다. 디오니시우스 1세는 심지어 플라톤을 다른 도시에 노예로 팔아버리라고 부하에게 내밀하게 지시했다는 얘기까지 전해진다(이 사건의 실체에 대해 플라톤은 편지에서 침묵한다). 권력과 철학이 충돌해 빚어진 참사였고, 플라톤은 가까스로 아테네로 돌아온다.

그 20년 후인 BC 367년 디오니시우스 1세가 죽고 젊은 2세가 즉위하자 디온은 어린 조카를 '철학자 왕'으로 만들 꿈을 다시 꾸게 된다. 그래서 환갑의 플라톤을 디오니시우스 2세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지적 허영으로 플라톤에게 관심을 갖던 디오니시우스 2세는 스스로 쓴 철학 논문을 플라톤에게 자랑했으나, 그는 자기 아버지 못지않게 용렬한 인물이었을 뿐이다.

디오니시우스 2세는 당대 최고 철학자를 멘토로 두었다는 명예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철학과 정의(正義)엔 무관심했다. 처음엔 플라톤의 가르침대로 잠깐 '현군(賢君)' 흉내를 내는 것 같더니 곧 싫증을 내고 권력정치의 방탕과 전횡으로 돌아갔다. 궁정 뒤켠에 방치되던 플라톤은 음모와 모략이 판치는 궁정정치에 휘말리게 되고, 그 와중에 디온까지 시라쿠사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삼촌을 의심하게 된 디오니시우스 2세가 디온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그를 추방한 것이다. 목숨까지 위협받던 플라톤이 시라쿠사를 탈출한 건 거의 기적이었다.

그 6년 후인 BC 361년에 디오니시우스 2세는 다시 플라톤을 초빙한다. 고령을 핑계로 고사하는 플라톤에게 3단 갤리선까지 보내주는 호의를 보이자 결국 플라톤도 디온의 시라쿠사 복귀를 왕에게 설득하려는 목적으로 초대에 응했으나, 결과는 역시 실패였다. 플라톤은 쓰디쓴 환멸과 함께 시라쿠사를 떠난다. 분노한 디온이 군대를 동원해 시라쿠사로 진군하자 디오니시우스 2세는 외국으로 도피한다. 하지만 권력을 장악한 디온도 곧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시라쿠사는 계속된 내란과 자멸(自滅)의 난장(亂場)으로 추락하고 만다. 몰락한 아테네의 길을 시라쿠사도 비슷하게 따라간 것이다.

난 궁금하다. 내 나이인 66세의 플라톤은 거듭 참혹한 실패를 겪으면서도 이상정치의 꿈에 왜 그리 집착했던 것일까? 물론 플라톤의 시라쿠사 실험에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교육을 받아야' 이상국가가 실현된다고 주장했던 플라톤은 이젠 '최선의 법에 따라 살아가는 자유인'의 나라를 지향한다며, 자신의 정치철학을 수정한다. 쓰디쓴 현실정치 참여의 결과, '좋은 나라'에 대한 자신의 기대 수준을 낮추어 더 겸허해진다. 플라톤 사상의 이런 변화는 최후의 저작인 『법률』로 나타난다.

오늘의 시라쿠사 옛 도심은 플라톤이 절망했던 디오니시우스 궁정의 작은 흔적조차 없이 평화롭다. 모든 제국과 군주들의 자취는 사라지고 영원한 침묵의 폐허만 남았다. 권력과 욕망, 이권 다툼과 모략으로 가득한 현실정치 앞에서 철학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디온이 살해당하고 시라쿠사가 내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보면서 노년의 플라톤은 현실정치에 관여한 자신의 실천을 "기도하는 일과 흡사하다"라고 탄식한다. 그렇다. 천하 대란의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조국(祖國, patria)'을 보고 누군들 기도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글쓴이 / 윤평중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계간『철학과현실』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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