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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7. 희망의 새해 - 엄정식
 관리자  | 2021·12·28 15:18 |
새해를 맞으면서 지나간 한 해를 되돌아보며 우리는 회상과 성찰의 시간을 갖기 마련이다. 다가오는 새해를 위해 희망찬 계획을 세우게 되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젊은이들의 경우 비록 비현실적인 목표라도 과감하게 미래를 설정하는 편이지만, 노년에 접어들수록 과거를 돌아보고 회한에 젖거나 일종의 자책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피천득의 '송년'이라는 수필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반세기를 헛되이 보내었다. 그것도 호탕하게 낭비하지도 못하고, 하루하루를, 일주일 일주일을, 한해 한해를 젖은 짚단 태우듯 살았다. 민족과 사회를 위하여 보람 있는 일도 하지 못하고, 불의와 부정에 항거하여보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학구에 충실치도 못했다. 가끔 한숨을 쉬며 뒷골목을 걸어오며 늙었다." 그는 또 자조 섞인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할아버지'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를 처음 듣고 나는 가슴이 선뜻해졌다. 그러나 금방 자연 속에 순응하는 미소를 띠었다. 나는 어려서 '할아버지'라는 종류의 사람이 따로 있는 줄 알았었다." 이러한 심정으로 또 한 해를 보내는 노년층에게 '희망'이란 별로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어휘일 수도 있을 것이다.

희망은 자신이 바라는 어떠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는 기대나 예측을 의미한다. 그 대상은 다소 막연하고, 그 실현의 시간이 불명확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가지고 산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희망을 갖는지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바라는 것이 좀처럼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 심지어 내세에서라도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도 하는 데, 희망은 시공을 초월하는 특성을 지닌다. 또한 희망은 대부분 개인적 차원에서 나타나지만, 가족이나 친지들에 대해 생길 수도 있고 국가나 인류 전체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거나, 조국이 식민통치에서 해방되기를, 혹은 세계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는 것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인간에게 욕구가 있는 한 그 욕구가 충족되기를 바랄 것이고, 그것을 의식하는 한 희망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키케로(Cicero)는 "환자에게 목숨이 붙어있는 한 희망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모두 희망으로 연명하는 환자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희망은 우리에게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거나, 너무 과도한 것이기 때문에 흔히 그것이 망상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으로 끝난다. 결코 접근할 수 없는 무지개로의 통로가 되어 줄 뿐이다. 결국, 희망은 허약한 자들의 허망한 꿈일 뿐인가. 19세기 중반에 헝가리의 서정 시인이었던 헝가리의 페퇴피 샨도르(Petofi Sandor)는 이런 시를 남겼다. "희망이란 무엇인가. 창녀로다. ······ 그대가 고귀한 보물, 그 청춘을 바쳤을 때 / 그녀는 그대를 버린다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희망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다. 육신이 음식물을 섭취하며 생명을 유지하듯이 정신은 희망을 마시며 미래를 향해 발을 내디딘다. 우리는 희망을 디딤돌로 해서 위기를 탈출할 뿐 아니라, 영생에의 통로가 될 수도 있음을 체험하며 실존적 죽음을 극복하는 동기를 찾기도 한다. 새해를 맞아 우리는 희망을 합리적이고도 창조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희망으로 연명하지만, 희망을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글쓴이 / 엄정식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세계시민기구(WCO) 철학종교분과 위원장, 전 서강대 대학원장, 전 한국철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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