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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2. 신뢰 - 권병규
 관리자  | 2021·11·23 14:19 |
코로나로 인해 출국 수속에 장시간이 걸릴 것을 예상하고 평소보다 일찍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그런데 공항이 생각보다 붐볐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수속이 신속하게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효율적인 시스템에 대한 믿음과 자랑스러움이 밀려왔다.

그런데 최종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 싱가포르에서 환승을 준비하자니 빽빽하게 온갖 정보를 기재해야 하는 서류가 한둘이 아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줄을 서서 보건 관련 서류에 스탬프를 받고, 다시 입국 줄에 서서 기다리다 기존 서류와 다를 바 없는 내용의 추가 서류를 요구받아 세세하게 다른 양식에 기재하여 제출하고, 그 내용을 다시 컴퓨터에 입력하는 공무원 앞에서 한없이 기다리고, 그곳에서 벗어나자마자 다시 여권을 요구하여 확인하는 사람이 있고······.

이렇듯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쓰고 곳곳에서 서류를 요구하는 공무원들을 만나다 보면, 이런 절차가 자국에 여행 오지 못하도록 만드는 집단적 자해행위로 느껴진다. 이런 불편은 소수의 일자리를 지켜주기 위해 다수 국민과 여행객이 지불하는 비용이다. 고용, 안전,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디지털화를 통한 편의와 효율성을 희생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눈빛을 맞춘 어떤 집단은 일부 과정이 면제되는 특혜를 누린다. 사람은 못 믿고 서류만 믿는 나라에서 그들은 믿을 만한 사람들인 것이다. 신뢰는 소수의 전유물이고, 일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사회적 신뢰의 부재가 기득권 카르텔과 특권 형성이라는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는 것이다.

신뢰는 사회적 자본의 주요 구성요소이다. 사회적 자본은 거래 비용을 낮춰 사회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윤활유의 역할을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에 따르면 선진국이면서 복지국가일수록 정부에 대한 신뢰 수준이 높다. 2020년 기준 스위스, 노르웨이, 핀란드 국민의 80% 이상이 정부를 신뢰하며,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덴마크, 스웨덴 국민의 70% 이상이 정부를 신뢰하고, 스웨덴, 독일, 뉴질랜드,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캐나다 국민의 60% 이상이 정부를 신뢰한다. 미국은 46.5%, 우리나라는 44.8%, 일본은 42.3% 정도다. 우리나라는 중간 정도의 정부 신뢰 수준을 보이고 있다.

영국의 레가툼 연구소는 사회적 자본, 안전, 자유, 거버넌스, 투자환경, 기업 조건, 시장접근 및 인프라, 경제의 질, 삶의 조건, 건강, 교육, 자연환경을 평가하여 167개국에 대한 번영 지수를 발표한다.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번영 지수는 28위(2020년)로 높은 편이다. 교육과 건강은 각 2위와 3위로 최고 수준이었으나, 사회적 자본의 경우 139위로 매우 낮게 평가되었다. 사회적 자본의 결여가 번영의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이다. 사회적 자본의 산정에는 신뢰가 가장 중요한 요소로 반영된다. 사회적 자본 수준이 높은 나라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위스 순으로 OECD의 정부 신뢰 순위와 유사하다.

사회적 신뢰도와 경제발전은 상관관계가 높다. 실증 연구에 의하면, 사람 간의 신뢰가 10%P 높아지면 경제가 0.8% 성장한다. 그 경로는 다음과 같다. 사회적 신뢰도가 높아지면 거래 비용이 낮아지고, 글로벌 밸류체인 참여와 외국인 투자 유치가 용이해진다. 창의성 발현과 혁신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며, 신뢰에 기초하여 지식재산권이 오가는 디지털 경제에의 참여가 쉬워지고, 조직의 분권화를 통해 효율성 제고가 가능해진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공정이 화두가 되고 있다. 공정과 신뢰는 상호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공정함이 지속되면 신뢰가 만들어지고, 불공정하면 사회적 신뢰가 깨진다. 신뢰가 깨지면 사람들은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게 되고, 그 결과에 대해 인센티브까지 주어진다면 불공정성은 더욱 확산된다. 따라서 사회적 신뢰는 공정의 원천이면서 결과물이기도 하다. 공정은 신뢰를 매개로 하여 경제 성장과도 연결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반 국민들이나 사회제도의 신뢰 수준이 높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문제는 정치, 경제, 법률, 언론 등 소위 지도층의 신뢰 수준이다. 정치 지도자의 거짓말, 엘리트 카르텔, 거대기업의 불공정 행위, 사법 불신, 가짜 뉴스 등의 문제는 일반 국민의 이야기가 아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명실공히 선진국의 위상을 갖추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신뢰와 같은 사회적 자본의 축적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느 지점에서 공정한 사회 시스템이 고장 나 있는지를 관찰하고, 이를 근원적으로 개혁하는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글쓴이 / 권병규
법무법인 청현 외국변호사(미국 뉴욕주), 前 동아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 前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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