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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9. 배구에서 배우다 – 윤평중
 관리자  | 2021·11·02 21:20 |
요새 배구 중계를 자주 본다. 스포츠 방송을 집중적으로 보는 경험은 이십오 년 전 첫 연구년 출장 때 미국 프로농구(NBA)에 몰입한 이래 처음이다. 농구 시즌 중 일요일에 미국 지상파 방송 한 곳이 연속 중계해 주는 세 게임을 내리 볼 때도 있었다. 5~6시간을 계속 봐도 질리지 않았던 시절이다. 교수가 연구하러 가서 무슨 농구 타령인가 할지도 모르지만, 평생 골프를 친 적이 없는 내겐 소중한 주말의 여유이기도 했다.

세계 최고 농구 선수들이 '날아다니며' 펼치는 아크로바틱한 기예(技藝), 투혼의 스포츠맨십이 낳은 극적인 승부와 역전 게임에 매료되었다. 이 시절은 농구의 전설 마이클 조던과 찰스 바클리가 활약했던 농구의 황금시대와 겹친다. 아닌 게 아니라 한 시대를 풍미한 조던의 별명 자체가 '에어 조던'이었다. 내 학창 시절 동네와 학교에서 친구들과 농구를 즐겼던 기억도 한몫했다.

모든 스포츠 종목엔 나름의 특장(特長)이 있다. 예컨대, 조던의 농구, 손흥민의 축구, 류현진의 야구, 이종격투기 등도 다들 매력적인 스포츠다. 내 경우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방송으로 보는 구기 종목 선호도가 축구와 농구에서 야구로, 그리고 야구에서 배구로 옮아간 사례다. 지금은 국내 배구선수들 이름만 겨우 기억하고, NBA나 미국·한국 프로 야구, 유럽 축구 스타들의 면면도 잘 알지 못하는 지경이 됐다. 세월이 지나면 사람의 감정이 변하듯이 취미도 바뀌기 마련인 측면도 있을 것이다.

지난번 도쿄 올림픽 여자배구 국가대표팀의 선전이 보여주듯 배구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펼쳐지는 경우가 많고, 매 경기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눈물과 땀이 감동을 준다. 사실 이런 측면은 대부분 구기 종목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거니와 구기를 넘어 스포츠맨십 일반의 긍정적 특징이므로 배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배구 경기에서 유난히 상쾌한 감흥을 느끼는 데는 결정적 이유가 있다. 배구의 탄생에서 비롯된 경기 규칙과 관행이 배구의 매력을 틀 짓기 때문이다.

배구 경기는 쉽고 직관적이다. 직사각형 코트 위에서 네트를 사이에 두고 공을 주고받는 두 팀은 공을 바닥에 떨어트리지 않고 세 번 안에 상대 코트로 공을 넘겨야 한다. 공을 바닥에 떨어트리면 1점을 잃는다.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공격이나 수비에 성공했을 때 한 팀 선수들이 함께 환호하면서 서로를 격려한다는 사실이다. 스포츠맨십의 강점인 팀플레이의 한 극점(極點)을 보여주는 광경이다. 실점했을 때도 실수를 범한 선수가 자기 탓이라는 신호를 먼저 발신하면서 서로를 응원한다.

배구 규칙은 한 팀이 25점을 먼저 얻어야 그 세트를 가져오게 되어있다. 결국, 한 세트당 두 팀 합쳐 50번 가까이 기쁨과 격려의 세리머니를 하는 셈이다. 만약 5세트까지 가는 박빙의 경기라면 한 경기당 수백 번 넘게 팀 내 선수들의 자체 응원전이 환호와 함께 펼쳐진다. 이런 점에서 배구는 다른 스포츠 종목과 확연히 다르다. 코로나로 관중을 제한하고 관중들이 응원 소리를 내지 못해도 중계 화면에 크게 잡히는 선수들의 웃는 얼굴과 생동감 넘치는 동작들, 상호 간 격려의 몸짓과 손짓, 내가 실수했다는 겸양의 표시가 모여 보는 이들에게 밝고 상쾌한 느낌을 준다.

상대 팀과 몸이 직접 닿지 않게 코트를 네트와 중간선으로 나누어 페어플레이를 '강제'하는 규칙도 큰 몫을 했다. 선수들의 몸과 몸이 역동적으로 부딪히는 종목도 고유의 매력이 있지만, 배구 규칙엔 큰 강점이 있다. 상대 팀과 몸이 육탄으로 부딪힐 때의 참가자들의 부상 위험과 감정대립이 원천적으로 극소화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1895년 배구를 창시한 미국 YMCA의 체육지도자 윌리엄 모건(W. Morgan)이 애당초 의도한 것이다. 농구나 축구의 매력도 대단하지만, 보통사람들이 부상과 체력 걱정을 피하면서 누구나 함께 쉽게 즐길 수 있는 새로운 구기 종목으로서 배구가 창조된 이유다. 한 선수가 쳐낸 볼이 상대 팀 선수의 얼굴 등을 강타했을 때 직접 가서 사과하는 모습이나, 우리 팀이 점수를 얻었을 때 기쁨의 표현도 상대 팀을 배려해 선수들이 등을 돌려 하는 모습도 배구에 내재화한 상호 배려의 관행이다. 배구 감독들이 작전 지시 시간에 선수들에게 험한 질책을 퍼붓기보다는 격려하고 칭찬하는 모습이 많은 것도 배구의 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이런 배구 담론은 현상일 뿐이지, 배구의 현장은 크게 다르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취미로 하는 일반인의 배구 말고, 스파르타적 규율 아래 있는 학생 선수들 상황 때문이다. 실제 학교폭력 파문이 한국 배구계를 강타한 바 있다. 한국 스포츠계에 만연한 성적 지상주의는 경기력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지도자가 선수를 때리고, 선배가 후배를 괴롭히는 풍토를 낳았다. 공부와 인성교육을 포기한 학생 선수들을 '운동기계'로 키우는 관행은 스포츠 폭력의 온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해명한 배구의 본질에 대한 분석은 한국 스포츠계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폭력과 괴롭힘이 만연한 한국 체육계의 현실은 배구의 철학에 의해서도 근본적으로 비판받고 전면적으로 혁파되어야 한다.

스포츠 정신에 걸맞은 경기 규칙과 관행에도 불구하고 배구 경기 자체에 내재된 재미와 흥미, 사람을 매혹하는 운동의 힘, 남자배구의 호쾌함과 여자배구의 아기자기함, 멋진 기예와 삶의 축소판인 서사 구조가 없었다면 배구가 세계적인 인기 스포츠로 격상될 리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천문학적 자본의 논리로 작동하는 현대 프로 스포츠 세계의 현실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기량과 수입이 동행하는 프로 선수들의 세계는 전형적인 승자독식의 공간이다. 그럼에도 평생 가꾼 절정의 기예와 팀플레이에 집중하는 운동선수들의 땀방울은 어느 종목이든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배구의 스포츠맨십은 학폭 파문이 강타한 체육계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울림을 준다. 웃는 얼굴로 서로를 포옹하고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되 패배를 인정하며 미래를 위해 땀을 흘리는 모습이 우리 사회에서 희귀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배구선수들이 땀 흘려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시합에서 선보이는 멋진 협업과 상호 격려야말로 갈등과 증오가 넘쳐나는 한국 사회에 보내는 죽비소리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행복이 단발성의 큰 행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작은 기쁨을 자주 맛보는 데서 비롯된다는 통찰을 감안하면, 배구 경기 자체가 작은 기쁨을 양산하게끔 되어있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배구와 다른 주요 스포츠는 이 결정적 지점에서 서로 다르다. 이것은 단순한 '배구 예찬'이 아니다.

글쓴이 / 윤평중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계간『철학과현실』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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