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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6. 남길 것인가, 사라질것인가? - 김기봉
 관리자  | 2021·07·27 14:45 |
친하게 지내던 주변의 선배 교수들이 하나둘씩 정년퇴직으로 떠나고, 부모 세대분들의 부음을 접하면서, 이제는 내 차례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어떻게 떠날 것인가? 그 물음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은사인 노명식 선생님께서 말년에 했던 작업과 말씀이다. 선생님께서는 생전에 쓰셨던 모든 글을 모아 총서를 편찬하는 것으로 삶의 마무리를 하셨다. 순전히 혼자서 그리고 본인의 비용으로 작업을 완수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출판기념회조차 사양하고 친구분들과 제자들에게 책을 나눠주셨다. 선생님의 훌륭하고 멋진 행동을 그냥 넘길 수 없었기에 총서가 나오고 꽤 지난 후이기는 하지만 주변 분들이 나서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삶의 마무리를 계획하신 이유에 대해 밝히셨다. 선생님께서는 4·19 혁명과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났던 1960년과 1961년에 미국에 계셨다. 거기서 머물렀던 집에는 필요한 가구와 물품이 완비되어 있어서 참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고 하셨다. 그러다가 귀국에 즈음해서 이사에 관한 규정을 보니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있었던 그대로 원상복구를 하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 경험을 하면서 본인께서도 인생이란 여행을 마칠 때도 그렇게 정리하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다는 것이다. 자신이 있었던 자리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간다는 생각으로 선생님께서는 세상에 내놓았던 글들을 한곳에 모아 쓰레기 처리 한다는 자세로 총서를 만드셨다고 했다. 그때 그 말을 듣고 나는 혼자 생각했다. 선생님의 그 작업은 남긴 것인가, 없앤 것인가?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묻는다. 마찬가지로 노명식 선생님께서는 총서라는 형태로 자신의 정신적 무덤을 만드셨던 것 같다. 그 무덤까지도 거부하신 분이 법정 스님이다. 본인의 죽음과 함께 자신이 썼던 모든 글 빚을 없애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이 세상에서 내가 했던 모든 것은 업(業)이다.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업을 더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업장(業障)을 소멸하기 위해서다. 오늘날 매장을 하고 무덤을 만드는 장례문화는 사라지고, 화장으로 몸은 빠르게 없애고, 무덤도 거의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디지털 공간에서 내가 지은 '업'은 소멸되지 않고 빅데이터로 축적된다. 책은 절판되면 없어지지만, 인터넷의 기록은 지워지지 않는다. 사이버 공간에 내가 남긴 기록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인터넷 카르마(Internet Karma)'가 되어 인과응보로 작용한다(사사키 시즈카, 『인터넷 카르마』, 법장 스님 옮김, 모과나무, 2021). 종래의 인류 문명사는 집단기억을 축적하는 것으로 전개됐지만, 디지털 시대 인류는 기억이 아니라 망각을 위해 더 고심한다. 우리의 과거가 디지털 피부에 문신처럼 각인되는 세상에서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에 대한 보장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디지털 장의사라는 새로운 직업까지 등장했다.

불가(佛家)에서는 임종하면 <무상계(無常戒)>를 독송한다. 인연 따라 '나'가 생겨났다가 죽음과 함께 다시 본래로 돌아가니 얼마나 다행인가의 게송으로 영가(靈駕)를 위로한다. 천상병 시인은 우리 인생을 소풍으로 비유했다. 왔다가 놀고 간 자리, 다음에 누군가가 다시 놀러 온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이 말은 "군자는 홀로 있을 때도 삼간다(君子必愼 其獨也)"는 공자의 말에서 착안한 화장실 문화를 대변하는 표어다. 화장실에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쓰고 가는 게 아름다움이다. 인생도 그렇게 살다 가는 게 아름다움일까? 수명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그만큼 더 많은 시간을 병고(病告)로 시달리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어떤 마무리를 할 것인지에 대해 숙고한다. 자연에 사는 동물들은 남기는 것이 거의 없지만, 인간은 후손들에게 유산을 남긴다. 훌륭한 정신적 그리고 많은 물질적 유산을 남긴 사람일수록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는 것일까? 그러기엔 내가 가진 게 별로 없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 동안 그냥 사라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란 생각을 한다. 원래 나는 없었으니까.

김기봉
경기대학교 사학과 교수, 계간지『철학과현실』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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