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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 세계화시대의 국제기구 - 엄정식
 관리자  | 2020·07·14 11:28 |
  언론 보도에 의하면 최근에 일본 정부는 군함도(원명 하시마·端島) 탄광의 진실을 왜곡하는 근대산업시설 전시관의 일반 공개를 강행했다. 원래 일본은 이 섬을 포함한 메이지 시대 산업혁명 유산을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때,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한국인 강제 노역'을 인정하고 희생자를 기리는 전시관을 만들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한국뿐만 아니라 유네스코와 국제사회에 한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거액의 분담금을 내며 영향력을 키워온 일본의 입김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전체 분담금의 22%를 내던 미국이 유네스코 회원국에서 완전히 탈퇴한 뒤, 2019년 경제력에 따라 분담금 배분을 다시 했고, 이에 따라 중국은 1위가 되었으며 상대적으로 일본의 비중도 더욱 커졌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하여 다른 국제기구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가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7월 6일에 세계보건기구(WHO) 탈퇴서를 제출하면서 WHO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하는 절차를 시작했다. 앞서 그는 지난 5월 WHO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에 있어서 중국 편향적 태도를 취했다고 비판하며 탈퇴 의사를 밝혔다. 유럽연합(EU) 국가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WHO에 내고 있는 지원금을 다른 곳에 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도 WHO를 정치적으로 이용했음이 지적된다. 이러한 조치는 미국 내 코로나 확산의 책임을 WHO로 돌리기 위한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리 중국과 WHO가 밉다고 해도 미국이 지원을 끊으면 결국 힘없는 저개발 국가들만 죽어간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미국은 WHO의 최대 지원국으로 지난해 기준 총예산의 15% 정도인 4억 달러 이상을 지원해 왔다고 알려져 있다. 리처드 하스 미 외교협회(CFR) 회장은 최근 포린어페어스(FA) 기고문에서 "미국의 지도력은 쇠약해지고, 국제협력은 더욱 어려워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국제사회는) 무정부적인 사회가 되고, 세계는 더욱 혼란스러워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실 중국은 지난 10년간 국제기구에서 꾸준히 영향력을 키워왔다. 10년 전에는 국제기구의 수장을 맡은 중국인은 WHO수장이었던 홍콩 출신의 마거릿 챈 한 명 뿐이었다. 현재 전문 기구 15곳 중 중국인이 수장을 맡고 있는 곳은 유엔식량농업기구(FAO),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 국제전기통신연합(ITU) 등 4곳이다. 유엔환경계획(UNEP) 홈페이지에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이니시어티브는 일대일로 수혜국이 지속 가능한 개발목표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기회가 된다"고 적혀있다.

  현대를 우리는 흔히 '세계화(Globalization)'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러한 시대에는 그 어떤 국가도 현대사회가 야기하는 갖가지 문제들을 독자적으로 해결할 도리가 없다. 가령 한 국가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 인권문제 등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너무 크기 때문에 더 세분화된 접근이 필요하다. 또한 한 국가는 유행성 질병이나 생명공학, 환경문제 등 큰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너무 작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과의 포괄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물론 유엔을 비롯한 각종 국가연합체들이 있지만, 그것들 역시 개별 국가들이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편중되어 이들이 제시하는 접근 방식이나 해결 방식 사이의 충돌을 극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개별 국가와 각종 국가 연합체들이 당면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현대인이 한 나라의 국민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시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절감하는 것은 강대국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시민 각자가 국적에 얽매이지 않고 국가와 세계에 대하여 어느 정도 개방적이고 자율적이며 합리적인 태도를 지닐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자국의 이익이나 영광을 위해서라도 더욱 바람직한 처사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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