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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1. 정치의 팔이 짧아야 선진국 - 손봉호
 관리자  | 2020·07·07 13:23 |

  지난 5월 영국 주간지 <Economist>의 한 기사는 코로나19에 대처하는 데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한국 정부가 국민의 85%란 놀랄만한(remarkable) 신뢰를 받는데, 이는 세계 최고라고 했다. 일본, 독일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 국민과는 달리 한국 국민은 재난의 상황에서도 화장지 같은 생필품을 사재기하는 난동을 부리지 않는 것을 보면 전혀 근거 없는 평가가 아닌 것 같다. 물론 일시적인 현상이겠지만 정부에 대한 불신이 문화처럼 정착된 우리나라에서 정말 "놀랄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한국이 코로나19에 비교적 잘 대처하고 있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인구 100만 명당 사망자가 미국 402명, 영국 652명, 벨기에 843명인데 비해서 한국은 6명에 불과하니 비교도 될 수 없는 차이다. 메르스의 경험, 매우 합리적인 것으로 드러난 건강보험, 우수한 의료수준과 의료인들의 헌신, 위기에는 잘 단결하는 우리의 전통 등이 같이 작용해서 이룩한 성과다.

  이런 조건들에 한 가지 더 보태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정치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트럼프, 아베, 존슨, 보우소나루(브라질) 등 국가 원수들은 괜히 방역 전면에 나서서 이러쿵저러쿵 떠들다가 상황만 악화시켰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모든 것을 전문가들에게 맡겼고 정치인들도 가만있었다. 정말 천만다행이다.

  어쨌든 한국은 코로나19 덕으로 얼떨결에 선진국이 되었는데, 따져보면 그것이 당연하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진국이라 하니 켕기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우리의 후진적 정치문화다. 2018년 BBC의 의뢰로 영국의 여론조사기관 Ipsos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가장 큰 갈등 요인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 간의 갈등"(61%)으로 조사대상 27개국 평균 44%, 유럽 평균 20%보다 월등하게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2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얼마 전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모든 공공기관 가운데 진보가 가장 불신하는 기관이 검찰인 반면에 보수가 가장 신뢰하는 기관도 검찰로 드러났다. 한국에서 정치는 분열과 갈등을 의미한다.

  왜 한국에서 유달리 정치적 견해 차이가 사회갈등의 주범으로 작용할까? 정치가들의 수준이 낮고, 연고주의 등 부패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그와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정치의 팔이 너무 길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경우 치안, 국방, 교육, 복지,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경제, 외교까지 정치의 영향에서 상당할 정도로 벗어나 있다. 이미 50년 전 네덜란드에서는 어느 경제학 교수가 국가 경제를 위해서 수상 자리를 마다하고 중앙은행장으로 취임하고, 내각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는데도 같은 사람이 외무부 장관으로 봉직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삶의 거의 모든 분야와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두 정치의 영향을 받는다. 언론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교육자나 학자, 예술가, 사업가조차 어느 쪽에 줄을 서는가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고 역사 교과서조차 정권에 따라 내용이 바뀐다. 정치이념의 차이는 단순히 세계관이나 가치관의 차이가 아니라 엄청난 현실적 이해득실의 차이를 뜻하기 때문에 심각한 갈등의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로 인정받은 선진국 자격을 그대로 유지하려면 정치 수준도 높여야 하겠지만, 정치와 무관한 영역을 대폭 확대하고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코로나19 방역에서 손을 뗀 것처럼 교과서와 교육정책에서도 손을 떼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정치의 팔이 짧아야 나라가 선진국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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