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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 다양성을 허용하는 열린사회를 꿈꾸며 - 김도식
 관리자  | 2020·06·30 12:28 |
   대학생 때의 일이다. 학교에 가려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어떤 어른이 다가와서 "대학생이시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을 했더니, "대학생이 옷을 단정하게 입고 모범을 보이셔야지요."라고 한마디를 던지고는 돌아갔다. 그분은 내가 살던 동네의 중학교 선생님으로 등굣길 복장 단속을 나오셨던 것으로 보였다. 그때 내 복장은 지극히 대학생스러운 차림이었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요즘 청년들이 즐겨 입는 찢어진 청바지도, 색상이 요란하거나 이상한 모양의 옷들도 아니었다. 그 선생님이 지적한 나의 '단정치 못한' 그래서 '모범적이지 않은' 모습은 점퍼의 지퍼를 올리지 않아서였다. 그 당시만 해도 선생님에게 말대답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왜 점퍼의 지퍼를 채워야만 단정하고 모범적인 사람이 되는 건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왜 단정한 옷차림을 해야 하는 건지?"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내가 입고 싶은 대로 옷을 입으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얼마 전, 이미 애 엄마가 된 딸이 가족들과 있는 자리에서 "나 머리 노란색으로 염색할 거야!"라는 말을 던졌다. 그 당시에는 다들 "그래~ 잘하고 와~"라는 식으로 가볍게 넘어갔는데, 나중에 딸이 그 말을 건넨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노랑머리로의 염색을 부모에게 허락받아야 한다고 느낀 것인지 아니면 한술 더 떠서 "말려도 소용없어! 내 마음은 이미 확고부동해!"라는 선전포고인지, 이도 저도 아니고 단순히 '나 오늘 점심에 비빔밥 먹을 거야' 정도의 가벼운 말이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다행히 딸은 별생각이 없이 던진 말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만일 딸의 의도가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나 일종의 선전포고였다면 내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내가 딸의 선택에 제약을 두는 아빠였음을 드러내는 사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약 20년 전에 '노랑머리'라는 제목의 영화가 보여주듯이 기성세대에게 노랑 염색은 불량한 사람의 이미지를 반영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고정관념이 딸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마치 대학생 때 동네 중학교 선생님이 등교하는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듯이 말이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가로, 세로, 높이가 모두 2미터인 좁은 공간에서 평생 살도록 하면 그 사람은 엄청난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어쩌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삶일 수도 있다. 그 좁은 공간을 조금 넓혀서 3~4평짜리 방 안에서만 죽을 때까지 살라고 하면 2미터 공간에서 사는 것보다는 조금 낫겠지만, 여전히 좁은 세상에서 답답하게 살아야 할 것이 틀림없다. 우리의 삶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은 이동에 제한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무는 자유는,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우리가 포기하기 어려운 권한이다.


   사회적 관념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이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기존의 틀을 강요한다면, 그 좁은 고정관념의 틀 안에서 살아야 하는 후속세대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사고와 행동이 받아들여지는 사회일수록 구성원들이 자유로운 생각을 펼칠 수 있으며, 그러한 자유를 구속하는 사회는 열린 사회가 아니다. 가령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익숙하다는 이유로 젊은 세대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한다거나, 힘을 가진 세력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억누르려 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이는 힘없는 사람들에게 좁은 공간에서 나오지 말고 그 안에서만 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바나나의 멸종 가능성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현재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바나나가 한 종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 품종의 바나나에 결정적인 병충해가 발생하면, 머지않아 바나나라는 과일을 먹지 못하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는 다양한 사유를 요구한다. 우리 사회가 획일적이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는 데 실패하여 도태될 확률이 높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사회는 다양성이 공존하는 열린사회이다. 인간의 삶은 수학처럼 정답이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정치에 대해서도, 경제에 대해서도, 윤리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의견들이 공존하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견해에 대해서 서로 존중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이러한 열린사회를 방해하는 집단은 우리의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에 적이 되는 셈이다. 오늘따라 칼 포퍼(Karl Popper)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 다시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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