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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 신민(新民)과 친민(親民) - 정인재
 관리자  | 2019·11·05 11:52 |
  요즘 서양 학문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전통문화와 그 사상에 관심을 두고 살펴보려는 경향이 점차 늘고 있다. 한글전용시대에 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전통적 지식인들의 글들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있어, 마치 암호를 해독하듯 읽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면 바로 주자학적 사고에 빠져버린다. 그 이유는 서점에 나온 《사서집주》를 한문교재의 필독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사서(四書)란 주자가 편찬한 《대학》, 《중용》, 《논어》, 《맹자》의 네 저서를 가리키는데, 주자는 특히 《대학》을 죽기 이틀 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집주》 속에 그의 철학 개념들이 모두 다 녹아 있어 한문 입문자들은 알게 모르게 주자학 신봉자가 되어 버린다.

  《대학》은 원래 《예기》의 한 장이었는데, 주자가 이것을 《사서》의 하나로 만든 것이다. 그것은 성숙한 인격을 가진 지도자를 위한 입문서인데 주자는 이를 대인의 학문이라고 하였다. 대학은 삼강령 팔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삼강령이란 명덕을 밝히고[明明德], 백성을 친애하며[親民], 지극한 선에 머문다[至於至善]는 것이다. 주자는 백성을 친애한다는 것을 백성을 새롭게 만든다는 신민[新民]으로 바꿨다. 왕양명은 이러한 개정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예기》에 있는 《고본대학》그대로 돌아가 친민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주자는 그 밖에도 8조목의 격물치지 장에 대한 해석[傳]이 빠져 있다고 하여 자기의 철학을 그 안에 보충해 넣었다. 주자는 사물의 이치[理]를 알 수 있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강조한 주객대립의 격물론을 전개하였는데, 이 사상은 현대 과학과 서로 유사하다. 서양의 사이언스[science]가 도입되었을 때 이것을 격치학(格致學)이라고 번역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919년 5.4 신문화운동에서는 동양에는 없고 서양에만 있는 가치라며 과학과 민주를 구호로 내세웠다. 그런데도 격치학이 과학과의 유사성을 지녔기에, 우리나라에서도 서양의 과학을 나름대로 따라가고 있다. 그것은 정해진 모델[定理]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의 문제는 아직도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것은 주자학의 신민적 태도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민은 똑똑한 지도자가 어리석은 백성을 계몽하여 낡은 습관을 버리고 새롭게 만든다고 하는 상하의 대립적 구도로 되어있다. 그것은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도덕적 이성[理]을 가진 상층의 지도자[士]가 기운[氣]을 써서 살아가는 하층의 농부[農], 기술자[工], 상인[商]을 다스려야 한다는 철학이 신민의 해석에 녹아 있다. 주자학은 사농공상의 사민(四民)을 근본적 직업[本業]과 말단적 직업[末業]으로 나누어 놓고 특히 공업과 상업[工商]을 말업으로 간주하였다. 우리나라에 이러한 관념이 남아 있어 아직도 실업계[blue collar]보다는 인문계[white collar]를 선호하며, 고시생과 정치지망생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양명학에서는 사민은 직업을 달리하면서도 성인(聖人)이 되는 도를 같이한다는 이업동도(異業同道)의 정신을 주장한다. 따라서 어떤 직업을 갖더라도 자기가 하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는 서양의 직업관[Beruf]과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양명학자 황종희는 《명이대방록》에서, 공상도 모두 본업[工商皆本]이라고 주장하였다. 지도자[士]는 윗자리에서 백성의 낡은 사고를 바꾸려는[新民] 갑질하는 존재가 아니라, 백성을 가까이하여[親民]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같이하며 봉사하는 인물[仕]을 말한다.

  신민적 태도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일체를 새롭게 한다고 하여 전임자가 하던  모든 것을 낡은 습관[舊習] 혹은 쌓인 폐단[積弊]이라고 하여 뜯어고치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업무의 연속성이 끊어지고 만다. 그러나 친민적 태도는 이어가는 것이 좋은 것[繼之者善也]이라고 하여 앞선 사람의 친숙한 업무를 이어나가기 때문에 전통이 생기고 역사가 이어진다. 이처럼 고본대학의 친민 정신은 오늘날에도 계승해가는 것이 성숙한 사회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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