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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5.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 권병규
 관리자  | 2019·10·29 11:02 |
  어느 청명한 일요일 남산 한옥 마을 입구에 앉아 소풍을 마치고 나올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에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중국, 서양 등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모여서 떠들거나 무리 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베트남 사람으로 보이는 한 남자는 멋지게 차려입은 자신의 모습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있었고, 일군의 인도네시아 여성들은 히잡에 한복을 입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내 앞의 외국인들은 나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친구나 동료들이 의미가 있을 뿐, 옆에 앉아 있는 나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에게도 그들은 잠시 후면 어딘가로 사라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공간이 존재한다. 생명체를 이루는 분자와 원자 사이에도 많은 공간이 있으니 한 인간 역시 공간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다만 그 밀도가 다를 뿐이다. 공간의 간극이 좁을수록 한 생명체로서 기능을 하게 된다. 사회에서 공간은 가족, 친구, 동료 등의 관계를 통해 채워지고 이를 통해 사람의 존재가 의미를 드러낸다.

  사람 사이의 공간을 채우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음악이라는 음파로 공간을 채울 수도 있고, 영상이나 예술 작품이라는 빛의 파동과 입자로 공간을 채울 수도 있으며, 광장이나 무대에서는 목소리로 공간을 채울 수도 있다. 이렇게 채워진 공간은 그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접착제의 역할을 하면서 인간(人間)의 생각이나 감동이 공유된다.

  공원에서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일정한 공간을 유지하면서 맑은 날씨와 경치를 즐길 수 있는 것은, 그 공간을 자유, 평화, 사랑, 안전과 같은 추상적인 믿음이 채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 사이의 공간이 텅 비어있다면,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공공장소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경우는 그곳에 다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빈 공간을 채우고 존재가 존재로 인정받는 쉬운 방법이 있다. 이는 타인을 향해 친절과 배려를 베푸는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말하듯이,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과 같은 작은 행위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몸짓을 의미로 다가오는 꽃으로 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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