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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3. 부러진 의자 - 엄정식
 관리자  | 2019·10·15 15:29 |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유럽본부 앞 광장에는 다리 하나가 부러진 대형 의자 조형물이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부러진 의자(Broken Chair)'로 명명된 12미터 높이의 이 거대한 의자는 조각가 다니엘 버셋(Daniel Berset)에 의해 1997년에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핸디캡 인터내셔널(Handicap International)'의 의뢰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국제 비영리 조직인 이 기구는 2018년 1월 '휴머니티 앤 인클루전(Humanity & Inclusion)'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는데, 장애의 문제는 결국 인권 혹은 인류애의 구현과 무관하지 않음을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단체의 주요 활동이 대인지뢰 사용을 금지하는 '오타와 협약(Ottawa Treaty)'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조형물이 직접적으로는 지뢰 희생자를 형상화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부러진 의자'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어떤 의미로도 완전하다고 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형상화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상념에 이르게 된다. 고독과 갈등, 투쟁과 파괴, 불안의 현장에 마구 던져진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 말이다. 러셀(B. Russell)은 그의『러셀 자서전』서문에서 이러한 상황을 잘 묘사해 준다. 그는 사랑에 대한 갈망과 지식에 대한 추구, 인간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라는 세 가지 열정에 휘둘려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그중에 그는 사랑과 지식을 통해 천국으로 다가갔으나 늘 연민이 자신을 지상으로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고통의 절규가 메아리치며 내 가슴속에서 울려 퍼진다. 굶주리는 아이들, 압제자에게 고문당하는 사람들, 아들들에게 미운 짐이 돼버린 무력한 노인들, 그리고 외로움과 가난과 고통에 찬 이 세계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조롱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러셀 자신도 세상의 악을 줄여보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그래서 스스로 고통받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오늘날 인류는 러셀이 체험했던 상황보다 오히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핵전쟁의 위험은 물론 생태계와 환경의 파괴, 유전자 조작과 인구문제, 제4차 산업혁명의 행방과 AI의 남용, 더욱 심각해진 이념적 갈등 등 과거에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재난 앞에 우리는 직면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별로 개선의 여지를 찾아보기 어렵다. 현대인은 마치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채로 광활하게 펼쳐진 지뢰밭을 헤매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뚜렷한 탈출구나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사랑과 자비, 혹은 인애 같은 것은 우리에게 너무 부담스러운 덕목들일까. 그렇다면 러셀이 말하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연민', 그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우선 공유해보는 것이 덜 부담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계를 지니며, 지적으로 오류를 범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어떤 때는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어떤 의미로도 완전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두 '장애인'이라는 인식을 확산하는 것이 그 '부러진 의자'가 주는 진정한 메시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동서와 고금의 성현들이 한결같이 우리에게 전해 준 가르침의 요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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