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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 선악을 넘어서 - 엄정식
 관리자  | 2019·08·20 15:21 |
  벌써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 가족은 미국 동부 지역을 자동차로 여행하고 있었다. 체록키 족이라는 인디언들의 보호구역을 지날 때, 우리는 그들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토록 용맹한 종족들의 후예를 일정한 지역에 가두어 둠으로써 술과 마약에 찌들게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처사인지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때 다섯 살배기 막내가 불쑥 물었다. "아빠, 인디언은 좋은 사람이야, 나쁜 사람이야?"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렇게 대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디언 중에는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지. 좋은 사람도 항상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사람도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란다."

  일반적으로 미숙한 단계에서 우리는 사물의 본질이나 현상의 구조를 파악할 때 주로 선악을 기준으로 해서 조명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산천초목을 모두 의인화해서 나쁜 것과 좋은 것으로 나누기에 이르는 것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들이 이러한 구조를 지니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인지가 계발되면서 우리는 점차 다른 가치를 기준으로 해서 세상을 바라볼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가령 우리는 붉게 물든 노을을 배경으로 한 한 그루의 거목을 바라볼 때 그 나무의 크기 자체에 대해서 경탄할 수 있고, 그 숭고한 아름다움에 황홀해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그 나무를 거기에 그렇게 존재하게 한 자연의 섭리에 경외감을 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실감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사물과 현상을 구성하는 중추적 가치에 선악(善惡)뿐만 아니라 미추(美醜), 진위(眞僞), 성속(聖俗)도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인류 문화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도덕과 정치는 물론 예술과 과학, 종교 등을 창출하게 된 근거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간에게 다른 동물과의 차이가 있다면 진선미성 등의 중추적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러한 가치를 기준으로 해서 세상을 인식하고 평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에게 똑같은 정도로 이러한 가치들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심미적 가치를 중요시하여 세상을 주로 예술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진위의 관점을 중심으로 하여 세상을 과학적으로 바라보는 경향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주위에는 예술가도 있고, 과학자도 있으며, 종교가도 있고, 이들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악을 분별하기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만약 30여 년 전의 우리 막내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주로 그러한 관점에서 평가하고 사람들을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으로 구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독선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피폐해지고 또 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한 곳이 될 것인가.

  미숙한 사람은 자신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 성숙한 사람은 될 수 있으면 다양한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러한 관점을 근거로 해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미숙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짐으로써 나는 조금씩 성숙한 사람이 되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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